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보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자기의 죄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 묻는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살다보면 정말 알 수 없는 고난이 닥치고 고통을 받게 되는 일들이 있다. 그 고난이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수록 고통은 더 커진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을 믿고 의지하면, 덜 고통스럽고 담대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고난에서 벗어날 때 주님을 찬양하고 영광드릴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며, 고난을 즐거워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시는 손길을 구하고 싶다.
2. 어구
7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맹인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순종하였을 때 임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기꺼이 받는 자에게 임하여지는 것 같다. 물론 살다보면 부지불식간에 얻게 되는 은혜도 있지만, 순종하여 받게 되는 은혜는 하나님과 좀 더 특별한 관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순종함은 의지함이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맹인은 안 씻어도 그냥 낫게도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나(우리)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분의 일에 우리를 동참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참 섬세하신 분이신 것 같다.
3. 문장
25절: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바리새인의 매서운 다그침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그가 아는 진실만을 고하는 이 사람의 태도가 놀랍다. 바리새인은 집요하게 따져 물었다. 이 일이 어찌된 일이냐고, 맹인이었던 자에게 한번 묻고, 그 다음은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까지 불러내어 추궁하였다. 부모는 바리새인이 두려워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니 아들에게 다시 물어보라고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맹인에게 직접적으로 예수님은 죄인이라고 폄하하며, 맹인이었던 자에게 다시 추궁한다. 그러나 맹인은 굴하지 않고 자신이 겪고 이해한 사실 그대로를 전한다.
그의 태도는 요한복음 5장의 연못가 병자와는 사뭇 다르다. 은혜를 받았어도 그것에 대한 태도는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의 담대함은 순종함으로 그분을 온전히 의지하고 따랐던 예수님과의 관계의 형성, 그리고 암흑 속에서 구원해 주신 분에 대한 확고한 믿음(확신), 자신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일으켜주신 분에 대한 감사로 인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태도는 은혜 입은 자로서의 마땅한 도리를 보여주는 것 같다.
4. 문단
24~34절
27절에서 맹인이었던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외친다.
“왜 들으려 하지 않습니까?!” 그의 답답한 심경이 느껴진다.
바리새인들은 그가 맹인이었던 사실까지도 믿으려하지 않았다. 보고도 믿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그들은 소경, 귀머거리와 다름이 없다. 비단 이런 일이 성경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인가? 세상 속에서 크리스찬들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를 지으며,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그리고 34절처럼 말한다. ‘네가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하나님을 얼마나 안다고 날 가르치려 드느냐?’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덕은 커녕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만든다.
이런 모습이 나에게도 있을지 모르겠다.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교회가 필요하고, 바른 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 같다. 귀머거리, 소경 같은 자가 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고, 내게 진리를 올바르게 가르쳐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