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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계획] 1창 6; 17-20 방주를 세우도록 부르심을 받은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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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창 6;17-20 방주를 세우도록 부르심을 받은 노아_1
 

2011.1.23.주일오전, 창조명령

[창]6: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창]6: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창]6: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창]6:20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창조의 명령을 주신 이후로 그들은 죽을 때까지 그 명령을 수행하며 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명령을 문화명령이라고도 합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환경과 상황에서 이 명령을 이루면서 그래서 문화를 만들어 내면서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을 쌓았고 어떤 사람은 육축을 쳤고, 어떤 사람은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이모 저모로 살아가면서 이 창조의 명령을 수행하였는데 그 모든 행한 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아가 방주를 지은 일입니다. 그 일이 왜 가장 위대한 일이 되었을까요? 왜냐하면 방주를 지음으로써 그는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생물들의 생명을 구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노아를 불러 그가 행할 일을 알려주셨습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하나님은 앞으로 노아에게 맡기실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위해서 그 일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해주십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그 이유는 홍수가 그 땅에 임하여 온 육체가 다 죽음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냥 방주만 지으라고 했으면 노아는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가 앞으로 자신이 할 일의 의미와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잘 행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계속 이어서 18,19절을 보십시오.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이제 하나님은 노아에게 약속을 해주십니다. 굳건한 언약을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노아가 자신의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방주를 만들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고 또한 모든 생물의 암수 한 쌍씩 함께 이끌어 들이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홍수로 멸망당하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언약은 노아의 측면에서 해야 하는 일이 있었고 하나님 측면에서 하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노아는 온 가족과 함께 방주를 짓고 모든 생물 중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이고 그 안으로 함께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 편에서 그들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노아는 충만해야 했고, 정복해야 했으며, 다스려야 했습니다. 100년 동안 방주를 짓고, 1개월 동안 모든 생물을 데리고 들어가고, 1시간 안에 온 가족과 함께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은 모든 창조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가장 중요한 명령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정말 중요한 명령이었을까요? 당연합니다. 세상에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어디있습니까? 그러니 생명을 살리는 일이면 가장 중요한 일이 됩니다. 분명 노아가 마른 하늘에 산 위에서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고 불합리한 일처럼 보였지만 특히 그런 일을 온가족 8명이서 다 수행한다는 것은 어이없어 보였지만 또한 모든 생물을 그 속에 다 태운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일은 정말 그들 자신에게 생명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약속을 지켰고 하나님도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구원이라는 주제로 생각해보면 우리도 마찬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이 가족관계 혹은 가족과 같은 관계로 구원의 방주를 세우고 있습니다. 그 안에 있으면 믿음을 갖게 되는, 그 안에 있으면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그 안에 있으면 성령충만하게 되는, 그 안에 있으면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그런 방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4단계로 만들어서 각각 수준에 따라 거할 수 있게도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많은 영혼들을 이끌어 들입니다. 그런 다음 함께 들어가서 그속에서 다같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방주의 제작 패턴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교회의 일들과 너무나 동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노아처럼 주님의 약속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놀라운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에 우리가 행하는 창조의 명령이며 가장 중요하고도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노아에게 있어서 이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은 그냥 어쩌다가 내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이 명령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노아에게만 홍수의 심판과 그 심판을 피하는 방주의 제작을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우리는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드는 일은 운명이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서 창세기 5장 29절에 보면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노아를 낳고 그의 이름을 짓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창세기 5장 29절을 읽어봅시다.
“5: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노아의 아버지의 이름은 라멕이었습니다. 라멕은 이 한 구절을 통해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삶을 간절히 원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여호와의 저주 속에서 살면서 수고로이 일할 수 밖에 없는 것을 괴로워하였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안위를 받는 것입니다. 그 저주가 풀리고 위로와 회복과 구원이 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대에는 그러한 구원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라멕은 태어난 아들에게 안위함이라는 뜻의 노아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그 구원이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입니다. 자신은 이루지 못한 꿈이 그 아들에게는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아들이 이루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노아의 아버지 라멕 뿐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살면서 간절히 가나안에 가고 싶어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가나안에 가고자 했는지를 창세기 11장 31절 말씀 속에서 발견합니다.
“11: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왜 가나안으로 가고자 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떠났던 곳은 후대의 바벨론이었고 가나안으로 가고자 했으나 역시 어떤 이유에서인지 여전히 바벨론의 한 지역이었던 하란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데라는 바벨론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결국 데라는 하란에서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소원은 비로소 그 아들 아브라함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가도록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꿈을 비로소 아들이 이번에는 하나님의 힘을 힘입어서 비로소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가나안에 도착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도 왜 내가 목사가 되었을까를 고민해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인생 속에서는 도저히 알 수 가 없었습니다. 그저 제가 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저를 부르시고 저는 그 부르심에 응답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목사가 되도 어떤 목회를 할 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부목사를 하다가 청빙을 받는 정도, 혹은 강의를 하는 교수목사가 되는 정도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저는 저의 아버지를 통해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목사가 되고 싶어하셨답니다. 그리고 보면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목사가 되고 싶어하신다고 하시고 가족들은 막 말리고. 아버지가 포기하고 난 다음에는 잊어버렸었지만 제가 왜 목사가 되었을까를 고민하면서 그 의문이 풀렸습니다. 저는 운명적으로 목사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가 못다한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정말로 하고자 했지만 이룰 수 없었던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여러 아들들 중에서 제가 그 일을 맡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운명이었습니다.

"닉 부이치치의 허그"라는 책에 보면 그가 왜 자신이 이런 모습으로 태어 나야 했는가를 고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고민에 대한 그 자신의 해답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주어진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현실 세계에서 자신에게 닥친 어려운 문제를 지혜롭게 잘 해결하였습니다. 그것이 결국 그로 하여금 놀라운 강연자로, 사회사업가로, 비전을 이루는 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고민에 대한 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현실적인 접근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전혀 새로운 접근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미시적인 접근입니다. 그 속에 있는 의도와 목적을 세밀하게 분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오는 것은 ‘죄’입니다. 죄는 결코 현실적인 접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미시적으로 현실에 나타난 일들을 규명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거시적인 접근입니다. 더 큰 의미를 가지고 더 큰 역사를 통해 현실을 규명합니다. 그렇게 접근하면 나타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운명’입니다. 결국 다시 말하면 닉 부이치치가 왜 자신의 모습을 괴로워하였는가에 대한 이유는 ‘죄’때문이고, 그가 왜 그런 모습을 가지고 태어났는가 하면 그것은 ‘운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운명이 있습니다. 그 운명은 때로는 부모세대로부터 시작되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여러분의 과거로부터 시작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부모가 간절히 원한 것은 구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부모가 간절히 원한 것은 새로운 땅을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모가 간절히 바란 것은 목회자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부모가 간절히 원한 것은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과거의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과거에 간절히 원한 것은 구원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새로운 땅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은 이 교회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이 왜 이 교회에 왔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부터 얻고 싶었던 그 구원을 얻기 위해서, 새로운 땅을 얻기 위해서,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이곳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바로 이러한 운명적인 부르심이 있습니다.

노아는 그 운명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당대에 완전한 자요 의인이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 운명, 아버지 라멕으로부터 이어진 이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그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생명, 그리고 모든 생물들의 씨를 살렸습니다. 그 운명을 따랐기 때문에 얻은 놀라운 유익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 운명을 따랐습니다. 아버지 데라가 이루지 못한 꿈을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이루었습니다. 가나안에서 그는 마침내 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얻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도 감사하게도 목사가 되었습니다. 대학시절 신학이 아니라 철학을 한다는 것은 큰 유혹과 시험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신학을 준비하기 위해 함께 철학을 하다가 목사되기를 포기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학부를 졸업하고 신대원에 입학하였고 제일 기뻐하신 분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면서도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은 아버지였습니다. 하나님은 늘 아버지를 통해 이일을 이루어주셨고 결국 부족하지만 오늘 이때까지 이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 운명 앞에 있습니다. 때로 여러분은 구원을 얻고자 했으나 돌아섰고, 땅을 얻고 싶었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연기했으며, 주의 일을 하고 싶었지만, 교회를 세우고 싶었지만 힘이 닿지 못했습니다. 이제 다시 그 기회가 왔습니다. 이 신형교회 속에서 그 부르심이 다시 여러분에게 주어집니다. 그 운명을 이루어보시지 않겠습니까? 다음 교회로 또 다시 미루지 말고 지금 이곳에서 여러분의 운명을 한번 성취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6장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나고 있습니다.
“21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오늘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은 결국 우리 자신의 식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음 교회를 간다 하더라도 거기서 행하는 모든 일은 여러분의 상급이 되고 여러분의 열매가 되고 여러분의 식물이 될 것입니다. 이 교회를 다니면서 아무 식물 없이 배고프게 궁핍하게 아무런 상급도 열매도 식물도 없이 살지 마시고 이곳에서 여러분의 식물을 저축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노아가 정말 방주 안에 들어갔을 때 배가 고팠다는 말이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 에서 더욱 풍성한 삶을 살게 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올해 여러분에게 주시는 창조의 명령을 바로 이 교회에서 실천하여 더욱 충만하고 더욱 정복하며 더욱 다스리게 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1역사서} <1적용> <2시점> [8사역]~[0복음], [5-1계획]
1. 하나님은 노아에게 가장 위대한 창조의 명령을 주셨고 그 명령 속에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2. 노아가 이러한 명령을 받은 것은 그의 이름으로부터 시작되는 그의 운명이었습니다.
3.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운명이 있고 우리들에게도 그런 운명이 있습니다.
4. 우리는 이 운명을 거스리지 말고 위대한 창조의 명령인 사역을 행하기 위해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