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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요 5; 2-10 삼십 팔년된 병자 이야기
2013.1.20.주. 주일오전. 주제설교-계획
*개요 {5복음서} <2시점> [2분류]-[5은혜]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월이 시작된지 벌써 절반이 지났습니다. 이 희망찬 새해
첫번째 달에 미래에 대한 계획과 소망을 가지고 출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무런 계획이나 소망이 없이
한해를 시작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런 사람들은 그저 반복적인 삶을 살 뿐입니다. 발전이나 상승보다는 현상유지나 혹은 퇴보에 더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비행기가 날아갈 때에 기수를 아래로 내리면서 하늘로 점차 떠올라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늘로 올라가려면 기수를 높이 듭니다. 그와
같이 인생에서 기수를 높이지 않고는 그 인생이 발전하는 경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실 인간에게는 소망과 계획이 필요한 법이지만 그런 미래에 대한 생각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은 점차 낮아지고 있습니다. 소망과 계획을 세웠다 하더라도 어려움이 닥치는데 그런 목표가 아예 없다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미래를 준비하면서 목표와 소망을 가지려고 합니다.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하고 다가올 홍수를 준비하면서 위험을 피하려고 본능적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준비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그럴 때 아무 생각없이 무방비한 상태에서 어려움에 닥치게 됩니다.
1.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르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에게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또한 스스로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많은 병자와 소경과 절뚝발이와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서 베데스다라는 못의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병이 나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천사가 그 물에 내려오기 때문이고 가장 먼저 물에 들어오는 자는 하나님의
천사의 능력을 통해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천사가 물에 내려왔을 때 먼저 그 물에 들어가게 되면 병이 나을 수 있는 이유는 그 천사가 하나님의
천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병이 낫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목표가 현재는 어떻게 변질되어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애초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낫는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사람의 노력으로 물에 들어가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목표가 변질되었고 사람들은 점차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무엇이 되고 말았습니까? 그것은
먼저 물에 들어가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주님을 만나고 있는 38년된 병자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5절부터 보십시오.
“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병자가 원한 것은 낫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있기만을 바랬을 뿐입니다. 자신을 낫게 하실 수 있는 예수님이 자기를 찾아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묻고 계시는 그 순간에도
말입니다.
2.
주님은 우리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이렇게 어리석을 때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주님의 눈으로 이 병자를 바라보십시오. 그 병자는 어리석었습니다. 정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자신의 상황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오직 자신을 못에 넣어줄 사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물으십니다.
그 물음이 무색할 정도로 이 병자는 집요하게 원하는 것은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생각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은 항상 그들의 진정한 필요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에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마시려는 잔은 이미 예정되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소경 바디매오 에게도 주님은 네 눈이 나았느니라 하시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모든 말씀들이 단지 예수님 좌우편에 서는 것, 눈이 낫는 것, 귀신이 떠나가는
것 이상의 궁극적인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말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그것을 주님은 채워주시고 그로 인해서 결국에는 우리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것까지도
채워주십니다.
이제 자신을 못에 넣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이 삼십팔년된 병자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께서 분명 진정한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할 때 그 말씀이 어떻게 그 병자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주고 있습니까? 8절입니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주님은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여기 너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있느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네 병이 나았느니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단계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 바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생기면, 그래서 물이 동할 때 빨리 들어갈 수 있으면, 그래서
병이 나을 수 있다면, 그 다음에 자리를 들고 집으로 걸어갈 수있게 되겠지만, 주님은 그 모든 중간 과정을 생략하신채 지금 당장 자리를 들고 집으로
걸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에게 궁극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삼십팔년된 병자에게도 주님은 그의 궁극적인
필요에 대해서 채워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은 가장 필요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대한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합니다. 바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3.
병자가 한 일은 그 말씀을 따르는 것 뿐이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여러분은 동의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나는 앉은뱅이가 아니고, 삼십팔년된 병자도 아니고, 물에 들어가기를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지도 않은데 왜 이 말씀을
나에게 주십니까?라고 의아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생각해보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제 병자의 입장에서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들리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지금 오랫동안 베데스다 연못에서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너무 늦게 물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자신보다 늘 건강하고 재빠른 사람들이 물에 먼저 들어갔습니다. 그런 삶은 오래 되어서 이젠 자리를 깔고 앉아있습니다. 아예 주저앉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은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38년이 지났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가오신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지만,
낫고자 한다고 대답하기 보다는 현재의 어려움에 대해서 더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어려움들이 결국은 그 자신의 목표를 다 잊어버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은 있어도 환경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 절망감이 이제는 낫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그가 나아버린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는 그 순간 그는 나았습니다.
이미 자신을 얽어매고 있던 모든 어려움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할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결정해야 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순종하지 않을 것인가입니다. 이 자리에서 정말 그대로 일어나 버리면 그것은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그 순종은
새로운 문제를 낳게 됩니다. 바로 안식일에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걷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늘 안식일에는 아무도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신대로 일어나게 되면, 그리고 자리를 들고 걷게 되면, 몇 발짝 띠는 것과 동시에 안식일 규례를 어기게 됩니다. 그런 위험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었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생겨나는 많은 크고 작은 마찰 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주님이 주시는 그 온전하게 하심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 알게 된 주님이 주신 그 온전한 구원이 더 감사하고 기뻤기
때문에 그는 바로 그 순종을 이루어냈던 것입니다.
4.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자.
우리가 주님께 나아오던 혹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아오시던 우리는 항상 주님의 말씀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왔더라도 우리는 주님의 더 궁극적인 채워주심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충만을 얻게 됩니다. 또한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셨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채우심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할
때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가거나 혹은 주님이 우리에게로 나아오시거나 이점은 동일합니다.
그 순종은 항상 뭔가 희생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38년동안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38년동안 한번도 하려고 한 적이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38년동안 항상 할 수 없었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주님은 그것을 하게 하십니다. 새로운 능력을 주십니다. 새로운 열심을 주십니다. 새로운 목표를 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그것이 어색해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만약 한번도 대든 적이 없는 부모님께 처음으로 자신은 부모님의 뜻을 어기고 교회를 가겠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만약 한번도 빠진 적이 없는 제사를 중단하고 주님을 섬기기로 결정하는 것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만약 한번도 머리를 숙인 적이 없는 교회에 나아가서 머리를 숙이는 것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만약 한번도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말한 적이 없는 가족들에게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주님이 이것을 말씀하실 때 이미 그 능력을 주셨습니다. 다만 자신이
그 능력을 부인할 때 그 능력은 안나타날 뿐입니다. 다리에 힘은 주어졌으나 지금 일어나면 대혼란을 일으킬 것 같아서 그냥 자리에 앉아 있기로 결심한다면
결국은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은 이미 안정이 되었지만, 화도 전혀 나지 않지만,
두렵지도 않지만, 그런 내색을 하면 버릇들까봐, 우습게 여길까봐, 오히려 계속 화를 내는 척을 하고 두려워 하는 척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38년을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 39년을 향해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악순환의 세월에 39년,
40년, 41년을 지속될 것입니다. 오직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원망만 하면서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38년의
악순환은 이제 끝을 내야 하겠습니다. 그 계기는 너무나 놀랍게도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일어서라’는 주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그 순간 더이상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고, 병이 나았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그냥 순종하면 됩니다. 일어날 수 있는 대로
일어나고 들수 있는대로 자리를 들면 됩니다. 그리고 걸어가면 됩니다.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못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못한다고 해야만 한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바로 우리들을 통해 주님은 38년된
병을 끝내버리십니다.
이러한 은혜를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몸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깨달을 때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몸과 마음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일때 우리는 모두 38년된 병자이고,
우리는 모두 이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하려는 모습입니다. 설사 내게 정말 어떤 병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께
순종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미래를 바꾸시는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십시오. 그래서 진정한 필요를 채워주시는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은혜로 충만하게 되십시오. 그러한 여러분들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