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행]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저희 신형교회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교회는 늘 사람들을 초대하고 사람들을 불러들여서 매주마다 사람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많으면 대교회라고 하고 중간 정도면 중교회라고 하며 작으면 소교회라고 합니다. 교단별로 이름은 다르기는 하지만 이단이 아닌 이상 다 같은 기독교 교회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에 대한 구분은 여자분들이 자동차를 구분하는 기준과 동일합니다. 남자들은 자동차를 그 차의 이름으로 구별합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그 복잡한 자동차의 이름을 외우기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그냥 딱 세 가지로 구별한다고 합니다. 큰 차, 중간 차, 작은 차. 이렇게 말이지요. 교회도 교단별로 교파별로 각기 제각각 이지만 그런 분류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교회는 딱 세 가지 구분일 뿐입니다. 큰 교회, 중간 교회, 작은 교회. 이렇게 말입니다.
여러 가지를 따지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교회도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지만 크게 따지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교회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교회의 진정한 의미와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가장 귀한 교회에서의 유익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 유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듣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이단이 아닌 이상 어느 교회에서나 얻을 수 있는 유익입니다. 교회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듣습니다. 교회에 사람의 말을 들으러 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다. 교회에 정치인의 연설이나 선생님의 강의나 연설가의 자기삶에 대한 추억 등을 듣기 위해서 가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그런 이야기들은 교회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에만이 우리는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어쩌면 그러한 변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의 변화는 아닐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변화는 일어납니다. 우리가 정성껏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에 우리는 우리의 심령에 대해 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그것을 들을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며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고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 그 말씀을 들려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3 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십 일 동안의 나타나심과 말씀하심은 사십 일 동안 매일 나타나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후 40일 후에 승천하셨는데 그 기간 동안 나타나시기도 하시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곧 하나님께로 올라가실 예수님은 자신이 가게 될 나라와 그 나라에 관계된 일들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마치 이제 곧 미국으로 이민갈 어떤 사람이 자신이 가게 되는 곳에 대해서 하게 될 일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말씀은 제자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오게 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자신이 하셔야 할 일을 다 이루신 후에 하나님 나라에 가시는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 이룬 후에 하나님 나라에 가야 합니다.
저는 종종 죽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해야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갑자기 죽게 되면 어떻게 하지? 나이가 제대로 들지 못하고 애들을 다 키워놓지 못하고 교회를 다 부흥시키지 못하고 학교의 일들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직업적인 성공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적인 업적을 남겨놓지 못하고 갑자기 죽으면 어떻게 하지?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고 아쉽고 안타까울까?’ 여러분은 그런 생각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갑자기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그럴 때 제일 아쉬운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삶에 대해서 아쉽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아쉽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대해서 아쉽겠습니까?
지금도 이세상 어딘가에는 그 모든 아쉬움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어떤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어쩌면 하나님을 위해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아쉬움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은 때가되면 그를 이 세상에서 데리고 가십니다. 그 이유는 그가 아쉬워하든 안하든 이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충분히 했기 때문입니다. 굳이 더이상 오래 살지 않아도 더이상 지켜보지 않아도 그가 자신을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혹은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살아 있을 때 충분히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데리고 가십니다. 더이상 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지금 현재 살아있다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행하게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가 자신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 있으며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아니면 그 자신이 하는 일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죽지 않게 하십니다. 때로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바로 그 일을 하셨습니다. 40일 뒤면 하나님 나라로 승천하시게 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은 그 기간 전까지 어떻게 해서든지 중요한 것을 알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 때 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은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였습니다. 너무나 핵심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반드시 알아야하는 내용들로만 꽉꽉 채워진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당부를 주고 계십니다. 그 이전까지 하신 이야기도 너무 중요한 이야기였겠지만 이제 하려는 이야기는 더더욱 중요한 이야기였습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라는 찬송을 작곡한 존 뉴턴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6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돌아가시전 아들에게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여러 친척들에게 얹혀 살면서 모진 고생을 하게 되면서 존 뉴턴은 어머니의 말은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나이가 들어 노예선의 선장이 되어서 노예를 파는 일을 하던 어느 날 심한 폭풍우 속에서 그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어머니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하나님, 긍휼을 베풀어주십시오! 한번만 살려주시면 평생을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정말 거짓말처럼 폭풍우는 잦아들었고 목숨을 건진 그는 항구에 입항하자마자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수업을 받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살았습니다. 그가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 주었던 것을 기억하였기 때문에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마지막 말이 존 뉴턴을 결국에는 살린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달라고 유언했다고 합니다. “한 때 이교도였으며 탕자였고 아프리카 노예상이었던 존 뉴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긍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크게 변화되어 마침내 성직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부인했던 바로 그 믿음을 전파하며 버킹검에서 16년 간을, 올니교회에서 27년 간을 봉사하였다.” 그가 이렇게 변화될 수 있도록 붙들어준 어머니의 당부가 바로 그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꾸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셨고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던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미처 다 이야기 해주실 수 없었을 때 그 이야기를 계속 들을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4절 말씀입니다.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신신당부하셨습니다. 분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바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단지 지역적인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경계를 벗어나지 말고 마음대로 지내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제자들이 함께 모이는 것이었으며 함께 기도하는 것이었으며 함께 주님을 묵상하며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미지의 것이었습니다. 성령충만일지 아니면 성령강림일지 아니면 그 어떤 새로운 것일지 천지가 개벽하는 것일지 도저히 알 수 없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다 지나고 난 뒤이니까 알 수 있지만 제자들이 그 말씀을 받았을 때에는 그게 무엇이며 어떤 모습일지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모호함 속에서도 예수님은 그들이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교회 속에서 모임 속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그 무엇인가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 분부하심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고 그것을 지킬 때에만 그들은 그것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 분부를 지켰고 그것을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도 그 분부하심을 받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한 우리 모두는 다 이러한 분부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모여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승진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결혼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집을 사는 것이고 땅을 사는 것이며 건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며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며 성령충만하게 되는 것이며 사명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자각하는 것이며 그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있지만 제각각 목표하는 것이 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질 그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목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죄를 짓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람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나면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처럼 아버지의 약속하신 그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무엇인가를 위로 내려오는 신령한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기다려야만 합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반드시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기다리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은 바로 기다리는 일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차라리 포기하고 정리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기다리게 하는가? 의아하고 이해하기 힘들며 화도 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직접 그 아버지의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으시고 기다리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설명드리기 전에 우리 교회에 있었던 한 자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이 자매는 우리 교회를 나오면서 오랫동안 기다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모태신앙으로 열심히 신앙생활해 온 이 자매에게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결혼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결혼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소개를 받기도 하고 연애를 하기도 하였지만 정작 결혼이 성사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나오면서 간절히 결혼을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이 애처롭고 안타까워 정 결혼이 안된다면 나라도 대신 결혼해 주고 싶을 지경이었습니다(물론 농담입니다. 그 자매는 사모의 절친한 후배였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2008년도에 결혼을 하게 되기 까지 이 자매는 우리 교회에서 무려 9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9년의 기다림끝에 마침내 이 자매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너무나 감사하게 변했습니다. 지금도 이 자매는 우리 교회에 십일조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9년간의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이 정말 이루셨던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랜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수없이 많은 불신과 수없이 많은 절망과 수없이 많은 원망 속에서도 함께 위로하며 함께 격려하며 견디게 하신 다음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수준으로 준비시키셔서 마침내 약속하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그 은혜를 찬송하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은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왜 여러분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지 않고 지금 당장 여러분의 노력과 여러분의 열정과 여러분의 집착과 여러분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나요? 아버지께서 그 약속하신 것을 주시기까지 우리는 조용히 잠자코 기다려야 함을 모르셔서 그러시나요? 왜 여러분은 별로 기다리지도 않고 간구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고 아무런 목표가 없는 사람처럼 한주 한주 그냥 그냥 시간을 허비하시나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이 예수님이 명령이라는 것을 모르시나요? 또한 여러분의 기다리는 것은 정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인가요? 정말 그렇다면 그 일을 위해 시간이 얼마가 걸리던 함께 기도하고 함께 위로하고 함께 노력해서 결국에는 그 일이 이루어짐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기를 원하시는 약속하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운 축복이며 그것이 예수님의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왜 여러분은 자신이 기다리는 것에 대해서 예루살렘에 거하여 이루려고 하지 않으면서 드러내지 않고 말하지 않고 기도부탁하지 않고 나누지도 않고 조용히 혼자서 그것을 이루려고 하시나요? 그것이 이루어진 다음에 조용히 빠져나가시려고 그러시나요?
결국 함께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별로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것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서로 다투게 됩니다. 기다리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교회가 별로 소망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함께 모여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린다면 우리는 정말 놀라운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해서 진심으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에게 이 명령을 주십니다. 이 교회에 오신 여러분에게 이 명령을 주십니다. 그 명령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의 교회에 오신 것이면 그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예수님의 명령을 믿고 따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약속의 성취를 누리십시오. 교회당에 오신 것이 아니라 교회에 오신 것이면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때문에 나온 것이라면 충분히 이 명령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이 교회에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때가 되어 우리 각자가 자신이 기다렸던 그 기다림의 성취를 경험하며 그속에서 진정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오랜 기다림 속에서 서로 사랑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나중에라도 함께 즐거워하며 추억하며 함께 감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4서신서} <4극본> [4욕구]-{5은혜} 1.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2. 교회에서 우리는 그 나라의 일에 대해서 듣게 되고 결국 그 다음에 하는 일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3. 이러한 사모함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변화되어지며 그로 인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4.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기를 원하시고 지금도 그러한 뜻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