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우리는 연속적으로 여호수아서의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가나안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낮은 땅, 자주빛 땅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전적인 의미보다도 오랜 광야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이란 고향과도 같은 곳입니다. 늘 이동하며 거주가 일정치 않으며 쉴 곳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이란 천국 그 자체 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때문에 우리들에게도 가나안의 의미는 비전이고 이상향이며 목표이자 꿈이 됩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천국이기도 하고, 목표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또한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나안에 이른다는 것은 삶의 변화, 인생의 변화, 습관의 변화 등의 성숙과 발전을 이룬 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이 꿈과 이상이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가나안은 우리의 꿈과 이상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저 세상에서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나라입니다.
가나안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좋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곳은 김용기 장로님이라는 분이 ‘한손에는 성경을, 한손에는 괭이를’이라는 구호로 1935년에 설립한 기독교 합숙 교육기관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오래된 성인 교육기관으로서 초창기에는 농업인을 대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이후 이 학교는 새마을 운동에서 정신교육의 원형을 제공하였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이라는 단어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가나안 생수, 가나안 유황, 가나안 보청기, 가나안 가방, 가나안 스파 등등 여러가지 제품과 광고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너무 많이 사용되니까 의미가 약간 쇠퇴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여하튼 가나안은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목표이자 이상향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은 그냥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요단강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40여년 전에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때에는 그들이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심하였고 결국 다시 광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40여년이 지나 그 다음 세대에 이르러 가나안에 두 번째 도전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전보다도 더욱 가까이 가나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요단강 앞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강만 넘어가면 되는데 문제는 이 강이었습니다. 장정만 70만명, 부녀자를 합하면 100만은 넘는 이 대민족이 배도 없이 강을 건너가기란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강을 헤엄쳐 건널 수는 없는데 어떻게 온 민족이 건너편에 있는 가나안에 도달 할 수 있겠습니까?
요단강을 넘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가나안이라는 점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죽음 이후에 가게 되는 천국에 비유하였습니다. 찬송가 291장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이렇게 죽음을 의미할 정도로 어렵고 힘든 과정이 된 것입니다. 이번에 일본지진사태에서도 보셨겠지만 검은 바다물결은 모든 것을 휘감아 버리면서 도시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정말 그 검은 물은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지진행일 물결은 둘째치고 여러분은 때로는 실제로 비가 많이 와서 생기는 거대한 흙탕물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강이 범람해서 주변 마을을 덮치고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릴 때면 검은 색이 아니라 황토색 물도 너무나 무섭게 변합니다. 아니면 그냥 강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한 만약 우리가 바로 그러한 요단 강 앞에 서있다고 해보십시오. 그리고 그 강을 넘어야만 가나안에 갈 수 있다고 해 보십시오. 과연 그 강을 잘 건널 수 있을까요? 마음이 두렵거나 떨리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가 가나안을 이루기 위해서, 가나안에 도달하기 위해서, 가나안을 소유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이 요단강을 건너는 일인 것입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각자 요단강을 건너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나안에 이를 수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을 건너는 것에 대해서 반복된 경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애굽을 떠나 올 때에도 물을 건넜습니다. 기억나시나요? 그들이 홍해바다를 건넜던 것을? 만약 그들이 그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면 다 죽었을 것입니다. 쫓아온 바로의 군대는 모든 이스라엘 민족을 죽이려고 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손길을 막으시고 이스라엘의 앞길을 여셔서 홍해가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길로 그들은 빠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바다 한가운데 갈라진 그 길을 따라 그들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애굽을 떠나올 때 경험했던 일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역시 물과 구원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노아의 홍수가 있던 때의 일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방주를 만들었고 그 방주 안에 거하였기 때문에 온 세계를 휩쓴 물의 재앙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물과 그속에서 얻는 구원의 경험에 대해서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3장 20절에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벧전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물은 원래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도구였습니다. 물은 세상에 넘치는 죄악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게 된 자은 그 물속에서 보호받았고 넘쳤던 물은 그들을 구원하는 표가 되었습니다. 그 물을 통과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의로운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워진 양심을 가지고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례 받았다는 것은 더러운 것을 씻었다는 뜻이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물의 죄악 가운데서 구원을 얻은 노아와 그 가족의 의미였습니다.
이와 같이 홍해를 건너는 것도 동일한 의미를 갖습니다. 홍해를 지날 때에 그들은 물 가운데로 지났습니다. 그들 옆으로 물이 벽을 이루고 있었고 그들은 그 한가운데를 통과한 것입니다. 이로써 그들의 죄가 씻어졌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물 사이를 지남으로써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신들을 쫓아와 죽이려고 하는 바로의 군대들을 보면서 다시는 뒤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살려주시는 주님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앞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기로 다짐하였습니다. 그 물은 바로의 군대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도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도 여전히 죄가 있지만 앞으로 죄를 떠나서 살려고 하는 의지가 있었기에 그들은 죄악으로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요단강은 어떤가요? 홍해를 지났을 때나 요단강을 이제 건너야 할 때에도 이 모든 원리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공교롭게도 가나안 입구에 있는 요단강을 만나고 또 다시 물을 건너야만 하는 상황에 닥치게 된 것은 놀라우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시는 자연스러운 결심과 의지를 새롭게 하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 물을 건너면서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요단강을 건너게 하십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설 때에 하나님은 백성들을 위해서 요단강을 막아주시기로 하셨습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13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방식은 홍해때와 달랐지만 그러나 흐르던 물이 그치고 길이 생기는 것은 동일하였습니다. 이전에는 바다 한 가운데로 길이 생겼고 이번에는 강이 흐르던 길이 막히고 길이 생겼습니다. 백성들은 홍해 때처럼 요단강도 새롭게 난 길로 온전히 걸어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이전에는 요단강에도 이를 수 없었지만, 노아의 홍수나 홍해처럼 요단강 자체가 그들의 죄악을 의미했지만 이제는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막아주시고 그들은 그 사이를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이일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은 존재하였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그 모든 죄악에 대한 심판의 물결을 막아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이른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죽음을 건너서 천국에 간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것일까요? 평생에 딱 한번 절정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 가나안이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한 고생의 과정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인가요? 여러분이 만약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고작 이정도인 것 밖에 되지 않아서 실망한다면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더 아름다운 것이 되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이 가나안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욱 사랑하고 희락하며 화평하게 되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이 가나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욱 충성하고 온유하며 절제하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이 바로 가나안인것입니다. 가나안의 완성은 물론 천국이겠지만 이세상에서도 충분히 가나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서의 목표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최소한 남에게라도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의 삶에서 가나안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결심입니다. 자신의 조급한 마음과 감정을 다스려서 미움이나 분노나 두려움을 없애기를 원한다면 그런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갖기를 원한다면 그는 올바른 소원을 가진 것입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라도 최소한 다른 사람이, 자기 가족이, 자기 아내가, 자기 남편이, 자기 아들이, 자기 딸이, 자기 아버지가, 자기 어머니가 그 속에 있는 욕구를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실천하는 삶을 살기를 기대하고 바란다면 그것도 올바른 소원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전부 가나안에 이르려는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럴 때 우리는 함께 그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자들이 되는 셈입니다. 저는 그런 마음을 가진 여러분을 돕고 있으면 그 속에서 저 자신도 그렇게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까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가나안에 들어갔나요? 그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애굽에서 나왔나요? 그 훨씬 이전에 노아와 그 가족은 어떻게 홍수 속에서 구원을 받았나요? 노아와 그 가족은 방주를 통해 물을 통과하였습니다. 내리는 비와 넘치는 물 사이를 방주 안에 있음으로 그들은 물을 통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할 때 홍해가 갈라지고 그 사이를 통과함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갈 때는 요단강이 끊어지고 그 사이를 역시 통과함으로써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원하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요단강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요단강을 지나가야만 가나안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단강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이 끊어진 요단강을 지나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인이지만 그 죄로 인해서 그 강 한가운데서 쏟아지는 물결에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막아주셔서 그 물에 휩쓸리지 않고 무사히 그 강을 건너는 은혜를 입은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의 홍수때에 죽어간 많은 사람들과 동일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생명을 얻고 죽임을 당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홍해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고 죽이고자 했던 바로의 군대와 동일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은혜를 입어 죽임을 당하지 않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 요단강을 건너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인 것과 우리를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가나안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하면서 요단강을 건너갈 때에 옆을 바라보십시오. 멀리 강이 멈춰서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곳에 무엇이 있나요? 어떻게 강이 멈춰져 있는가를 보십시오. 무엇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 강을 누가 막고 있을까요? 우리에게 쏟아져 내려와야 하는 그 무시무시한 물결을 막고 계시는 분이 있으니 그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기 몸을 찢으신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물을 막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나안에 도달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쏟아지는 많은 비난과 우리에게 가해지는 많은 유혹과 우리에게 주어지는 많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넉넉하게 이기고 강바닥을 건너 가나안에 도달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때문인 것입니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추운 겨울, 한 미군 장교가 지프차를 타고 달리다가 휘발유가 떨어져서 차를 길가에 세워놓았습니다. 본부에 무전 연락하여 휘발유를 급유받으려 했는데, 근처의 다리 밑에서 아기 울음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보니, 한 여인이 전신을 벌거벗은채 얼어죽어 있었습니다. 자기 옷으로 감싼 갓난아이를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는데, 아이는 죽지 않고 살아 울고 있었습니다. 그 장교는 ‘하나님이 이 아이를 살리려고 차를 이곳에 세우셨구나!’하는 마음이 들어 그 아이를 자기 양아들로 입양하였습니다. 그 후 그 아이는 미국에서 자랐고, 어느 날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친어머니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너의 어머니가 너를 살리기 위해 자기 옷으로 감싸주고 자신은 얼어죽었단다.” 나중에 그 아들은 한국을 방문하여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자기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 나를 낳아주시고 살리신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왔습니다!’어머니, 그때 얼마나 추우셨습니까?’ 그는 자기의 저고리를 벗어 무덤 위에 덮어주며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희생을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그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땅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삶 가나안에 가게 합니다.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붙들고 요단강을 건널 때 비로소 꿈에 기다리던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평생을 그렇게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원했던 한국에 오신 선교사님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양화진에 있는 선교사묘지에 묻혀있습니다. 그중 양화진에 처음 묻힌 선교사인 존 헤론의 묘가 있습니다. 그 묘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그는 미국에서 테네시 의과대학을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했지만 학교에 남아달라는 요구를 뿌리치고 멀리 우리나라에 와서 의료선교사로 평생 헌신하다가 이 땅에 그 몸을 묻었습니다. 마침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그를 가나안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가나안이 있습니다. 광야생활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가나안에 들어갑시다.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세계로 들어갑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위해 내가 죄인임을 고백합시다. 나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그 감사를 힘으로 삼아 가나안에 들어갑시다. 우리 모두가 요단강 건너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에 함께 들어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